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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시절일기

by Sinclair R. 2022. 2. 23.

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내 일기장에는 화난 감정들이 다양하게 담겨있다. 사실 솟구치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어떻게 해소할 줄 몰라, 괜히 불똥들이 남들에게 튈까 봐 다이어리에 꾹꾹 눌러 쏟아붓는 식이다. 그래도 그러고 나면 후련하기도 했다. 물론 내 일기장엔 화난 감정들만 있는 건 아니지만, 오직 나만 읽는 일기장이니까 나만의 비밀스러운 감정을 뱉을 수 있었다. 

누군가 내 일기를 훔쳐본다고 하면 단번에 내 얼굴이 붉게 타오르고 다시 화가 솟구치겠지만, 내가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볼 수 있다는 건 아주 아주 흥미롭고 은밀한 일이다. 누군가의 속마음과 내면을 탐험할 수 있는 기회이니까. 그만큼 일기는 솔직한 감정과 개인적인 시각이 담긴 글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속마음을 함께 유영할 수 있는 책, 일기를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 

<시절일기>는 김연수 작가가 10년 동안 쓴 개인적인 에세이를 몇 편을 가다듬어 정리한 일기집이다. 사실 나는 김연수 작가의 책을 접한 적이 없다.  작가님의 성명을 여러 번 들을 정도로 저명하신 분인데, 책을 접할 기회는 없었다. 아마 내 관심분야 외의 영역이어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다가 한국 작가 "김연수"의 글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작가님의 문체가 어떨까? 궁금해진 나는 무작정 온라인 서점에서 '김연수'를 검색하여 여러 책들 중에서 표지와 제목이 제일 와닿는 책을 골랐다. 그렇게 김연수 작가의 <시절 일기>는 내 책장 속으로 왔다.

김연수 <시절일기> 표지 디자인 엄혜리

<시절 일기>는 초콜릿 상자 속 여러 가지 맛의 초콜릿을 아껴 골라먹듯이, 가끔씩 꺼내 한 챕터 골라 꼭꼭 씹어 읽는다. 여러 챕터들 중에서도 단연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은 제1부다. 그중내가 <시절일기>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아래와 같다.

p.18
읽는 사람이 없을 것. 마음대로 쓸 것. 이 두 가지 지침 덕분에 일기 쓰기는 창의적 글쓰기에 가까워진다. 한 번이라도 발표를 목적으로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누군가 읽는다고 생각하면 한 글자도 쓰기가 싫어진다. 글쓰기가 괴로운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다. 글쓰기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일기 쓰기를 권하고 싶다. 누구도 읽지 않을 테니 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써라. 대신에 날마다 쓰고, 적어도 이십 분은 계속 써라. 다 쓰고 나면 찢어버려도 좋다. 중요한 건 쓰는 행위 자체이지, 남기는 게 아니니까. 
p.20
우리가 어떻게 두 번 이상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실수투성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고 영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한 번 더 살 수 있다. 

내게 일기장은 60%는 내 감정쓰레기통과 같은 역할을 한다. 아주 마음대로 탁 터놓고 쏟아붓는다. 콸콸. 가끔씩 내 일기장엔 너무 부정적인 언어들이 가득한 게 아닐까? 걱정이 되고 나에게 미안해져 일기를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곤 과거의 내 글들을 다시 되짚어 읽다 보면 깜짝 놀라곤 한다. 왜냐하면 내 일기장은 나쁜 감정들을 고백하는 방이기도 했지만 글로써 내 감정들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에서 나를 한층 더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헤쳐나가면 좋을지 고민들도 함께 두둥실 헤엄치고 있었기 때문에 내 글로 내가 위로받은 적도 많다. 그런 와중에 <시절 일기>의 저 구절들은 나의 일기 쓰기 행위에 힘을 실어준다!

또한, <시절일기>를 읽으면서 김연수 작가와 대화하는 기분이 든다. 내 일기장을 통해 나와 대화를 한다면, <시절 일기>를 읽으며 일기를 적으면 여러 작가들과 대화의 장을 나누는 기분이 든다. 왜냐하면 이 글 속에서 김연수 작가님은 여러 주제를 가지고  관련 책들의 저자들의 글들과 생각을 인용하며 본인의 생각을 풀어놓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시절 일기>를 통해 내 일기 속의 주제가 더 풍요로워지기도 한다.

특별히 엄혜리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시절일기>의 표지를 좋아한다. '부제: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과 본문의 글과 어울리게 여러 날의 밤을 상징하는 여러 모양의 달들을 반복적으로 패턴화 한 깔끔한 디자인. 너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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